밥빌런 :: 김부겸(김부'결')과 한나라당 -통추-

통추 준비위원, 제정구, 노무현, 김원기

이 사연은 생각보다 많은 얘기를 담고 있다.

일단 한나라당과 김부겸하면 좀 놀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어째서 '나는 민주당이다'란 책까지 낸 김부겸 전의원이 한나라당 의원이었을까???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양김시대까지 가야 한다.

그리고 '제정구' 의원을 빼놓을 수 없다.

제정구 의원 하면 잘 아시는 분들이 별로 없을 듯 싶다.

공정성에 논란이 있을 수는 있지만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익히 잘알고 있는 87년 6월항쟁

이후 통해서 수많은 지식인들이 정치권으로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잘아는 '노무현' 대통령도 이때 정치권에 입문하게 된다.

제정구 의원도 정치권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당시 양김시대의 주역 '김영삼', '김대중'은 우리 대한민국에 뿌리 깊은 해악을 남겼다.

그것은 지역주의라는 해악이다.

군사정부의 수작이란 말도 있지만 그 수작에 넘어가서

영남과 호남이 분열하고 싸움질 하게 만든 결정적 주인공은

분명 양김이다.

이 양김에 강력하게 반항했던 존재가 있다.

소위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라는 단체다.

소속된 인물들을 보면 대단하다.

김원기, 노무현, 제정구, 김정길, 유인태, 원혜영, 이철, 박석무 등등

김부겸은 그때의 회고를 이렇게 남겼다.


1988년이었습니다.
‘한겨례민주당' 간판을 달고 서울 동작에서 처음 출마했었어요.
당시에는 선거가 뭔지도 몰랐지요.
그냥 학생운동의 연장선에서 생각하며
구호 외치고, 유인물 뿌리고, 그렇게 선거운동을 했었습니다.
유권자들에게 살갑게 다가가는 선거가 아니었지요.
그냥 내 가슴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막 퍼붓는 식이었습니다.
표가 나올 리 없었고 정치적 유산도 남기지 못한 잔인한 패배를 했습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김영삼 후보한테 졌습니다.
곧바로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갔다가
1995년에 돌아와 정계 복귀를 했습니다.
야당인 민주당이 서울시장 선거에서 승리했는데,
소통령으로 불리는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겼으니
대단한 사건이었지요.
야당이 좀 더 잘하면 정권을 쟁취할 수 있겠다는
신호가 감지되었습니다.

희망이 넘쳤어요.

그런데 선거가 끝나고 채 한 달도 안 돼서
김대중 총재가 당을 가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DJ 입장에선 자신의 대권 행보에
통합민주당은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렇게 멀쩡했던 당이 갑자기 깨졌고
김대중 총재를 따라간 사람들은 새정치국민회의를,
남아 있던 사람들은 그대로 민주당 간판을 지켰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어요.
김대중 총재가 야당의 최대 주주였던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최대 주주라는 이유로 멀쩡한 조직을 깨고
의원들을 빼가고 당을 새로 만들자는 것에
흔쾌히 동의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때 우리들의 리더는
김원기, 노무현, 제정구, 김정길, 유인태, 원혜영, 이철, 박석무 등등
한 분 한 분 면면을 따지면 쟁쟁했어요.
결코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당을 깨자고 했을 때 김대중 총재를 만난
제정구 의원이 이런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내가 정치를 할 수 있게 해 준 것도 총재님이고,
배지를 달아 준 사람도 총재님이 맞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이유 없는 분당에 동참할 수는 없습니다.
의미 없는 재선, 삼선, 국회의원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초선으로 장렬히 전사하겠습니다.”

그래서 모여 만든 조직이 ‘국민통합추진회의'였어요.
김대중 총재가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었을까?
특정 지역은 나의 정치적 텃밭이라고 생각하니까
얼마든지 당을 깼다가 붙였다가 한 겁니다.
말이 안 되는 이유였어요.
우리가 기대한 현대적 정당의 모습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국민들이 가수 남진과 나훈아를 두고
전라도 출신이라서 좋아하고 경상도 출신이라서
좋아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지역과 관계없이 노래가 좋으면 그 가수를 좋아합니다.
정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참 순진한 외침이었던 거죠.

유랑극단 비슷하게 전국을 돌며 강연도 하고 그랬습니다.
하지만 199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제정구, 이부영뿐이었습니다.
나는 과천 의왕 선거에서 패했지요.
현실은 그렇게 잔인했습니다.

(중략)

1997년 대선 국면에서 ‘통추'는 결국 김대중 총재가 접수합니다.
지지층 확대를 위해 김종필과 연합했지만
반대로 고장 지지층에 대한 명분과 이미지가 약해졌어요.
보강이 절실했던 겁니다.
김원기, 노무현, 김정길 등이 ‘정권교체'를 명분으로 따라갔습니다.
김대중 총재 때문에 깨진 당에 뭉쳐 있다가
김대중 총재 때문에 다시 갈라진 겁니다.

힘겹게 남은 사람들은 조순(趙淳) 서울시장을
배경으로 당을 지켰습니다.
조순 시장의 지지율이 한때 50%까지 나오면서
버틸 힘이 생겼던 거지요.
하지만 이분은 대중을 이끌고 함께 호흡하는 매력은 없었습니다.
어느 날부터 지지율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한 달쯤 지나니까 16~17%, 이인제가 15~16%,
이회창이 24~25%의 구도로 정착했습니다.
당시 김대중 총재는 26~27% 정도였습니다.
지지율이 내려가면서 바닥에 이르자 버티지 못하더군요.

아침에는 이인제를 만나고 저녁에는 이회창을 만나고
이런 일을 몇 번 되풀이했어요.
그리고 어느 날 “안 되겠다, 통합하자.”
이렇게 된 겁니다.
통합이라는 선택은 좋은데 문제는 그 대상이었습니다.
통합을 한다면 철학이나 가치를 공유하는 세력이거나
아니면 제3지대에 서야 분명한 역할을 할 수 있는데,
조순 시장은 이회창 총재의 신한국당과 통합을 추진했어요.
곧바로 신한국당은 한나라당으로 개명하지요.
그때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떠나신 분이
얼마 전에 돌아가신 성유보 전 한겨레신문 편집위원장,
이삼열 전 유네스코 한국 사무총장 이런 분들이었습니다.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된 이유가 되었지요.
경쟁자였던 신한국당과 동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비판도 많이 받았지요.
하지만 지금도 그때 가졌던 고민에 대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무자비하게 당을 깨는데 따라가는 것이 옳았는가?’
시간이 지나 김종필과 합치면서
왼쪽 세력이 부족해 우리 사람들을 데려갔는데
‘그럼 못이기는 척하며 김대중 총재에게 갔어야 했는가?’
물론 정치란 유동적인 생물이니
상황에 따라 판단과 결정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납득이 안 됐어요.
당을 만들었다가 계산이 틀리면 깼다가 또 붙였다가,
적어도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상황들이 많은 상처로 남았습니다.
지역 구도를 배경으로하는 정치를 하니까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했습니다.
보스들의 필요에 따라 붙었다 깨졌다를 반복할 뿐이었지요.

그렇게 운명처럼 한나라당 창립 멤버가 되었고
거기서 5년간 정치를 했습니다.

제도 정치를 배우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했지만,
두고두고 정체성 때문에 시비를 달고 살아야 했으니
내 가슴에 박힌 ‘주홍글씨'인 셈이죠.
내가 한나라당 출신이어서 누군가는 불편하기도 하겠지만
확고한 신념 하나를 배운 건 있습니다.

정치는 공존이 가능하다.
별로 차이가 없다.

그런 믿음입니다

 

지금은 좀 지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것을 떠나서 김부겸이란 인물이 지금까지 보여주는 행보는 단단하다.

이런 과거를 가지고 있기에

그에게는 노무현이 말하던 지역주의 타파는 남다른 화두 일 것이다.

그가 대구로 간 것은 이런 행보의 연장이다.

이번 2020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로 나온 김부겸 후보를 보면

짠한 마음도 들지만

역시 시대의 흐름에서 새로운 시대정신을 엿볼수는 없어 보인다.

뛰어난 역량을 소유한 우리당의 소중한 인재는 분명하다.

괜히 어설프게 김부겸이 한나라당 이력을 가지고 있다고

그의 정치적 역정을 홰손 할 것은 아닌듯 싶다.

Posted by 배고픈 밥빌런 Posted by 배고픈 밥빌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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