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6월 항쟁의 중심에서

 

 

 1987년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벽두부터 달아올랐다. 부산의 추모 열기는 그 어느 지역보다 뜨거웠는데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이 부산극장 앞에서 개최한 추도식은 대규모 가두시위로 이어졌다. 검찰은 시위를 주도한 노 변호사를 잡아넣기 위해 이미 기각된 구속영장을 들고 판사의 집을 전전하며 하룻밤 사이에 무려 네 번이나 구속영장을 재청구 하는 탈법을 저질렀고 이 일이 모든 매스컴에 도배가 되자 노무현 변호사는 일약 전국적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

 

 민주화 열기는 점차 그 강도를 높여가며 6월 항쟁을 향해 치달았다. 나는 노 변호사와 함께 부산 변호사 사회에서는 전무후무한 ‘호헌철폐와 직선제를 요구하는 부산 변호사 시국선언’을 이끌어내기도 하고 연일 가두시위의 선두에 서 있었다. 5월부터는 부민협을 모태로 한 ‘부산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 결성되어 노무현 변호사가 상임집행위원장, 나는 상임집행위원이 되어 본격적으로 6월 항쟁에 뛰어들었다.

 

서울의 명동성당 농성이 해산했을 때 오히려 부산에서 가톨릭 센터 농성을 더욱 강고하게 이어감으로써 항쟁의 불씨를 되살리고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런 투쟁 끝에 결국 군부독재정권의 항복 선언인 ‘6.29 선언’이 발표되었다.

 

 

 6월 항쟁은 우리 민주화 운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민민주항쟁이었다. 직선제 개헌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설정한 ‘국본’이라는 연대투쟁기구가 결성돼, 그 지휘 하에 목표를 쟁취할 때까지 시종일관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투쟁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중심적 역량을 발휘한 부산 국본의 역할은 재평가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부산 국본의 중심에 노무현 변호사가 있었다. 내가 알기로 적어도 5공시기 동안 노무현 변호사만큼 치열하게 투쟁한 이가 없었다. 내가 그런 그와 함께 있었던 것은 큰 보람이었다

Posted by 배고픈 밥을적게먹어 Posted by 배고픈 밥을적게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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