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빌런 ::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1-29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어린시절 

남항초등학교 시절
경남중학교 시절
경남고등학교 시절

 나는 우리 부모님이 거제도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중인 1952년, 거제도의 한 시골 농가에서 태어났다. 함경도 흥남이 고향이던 부모님께서 1950년 12월의 ‘흥남 철수’ 때, 잠시 난을 피한다는 심정으로 별다른 준비도 없이미군 선박에 몸을 싣고 떠난 피난길이 거제도까지 이어질 줄은 당시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온통 눈 덮인 순백의 고향 풍경과는 너무도 다르게 ‘따뜻한 남쪽 나라’ 거제도는 푸른 보리밭이 끝없이 펼쳐진 초록의 땅이었고, 어머니는 그 풍경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더라고 몇 번이나 되뇌고는 했다. 따뜻한 날씨만큼이나 푸근했던 거제도 인심 덕분에 부모님은 간신히 그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2~3주 정도 예상하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야말로 맨손이나 다름없이 고향을 떠나온 부모님 앞에는 뿌리 잃은 고단한 삶이 가로놓여 있을 뿐이었다. 

 흥남의 문씨 집성촌인 ‘솔안마을’에서 수재 소리를 들으며 자라 함경도 지역의 명문이던 함흥농고를 졸업하고 흥남 시청 농업계장을 지내던 아버지가 피난지 거제도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곤 포로수용소의 노무일 말고는 달리 없었다. 어머니도 살림을 도와 계란을 떼어다가 어린 나를 업은 채 부산까지 건너가 파는 고달픈 행상 일을 했다. 이렇게 조금씩 모은 돈으로 우리 일가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맞추어 부산 영도로 이사를 했다. 커다란 배에서 내려 누렇게 익은 조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조밭을 지나 이사 갈 집으로 향하던 풍경이 내 어린 날의 기억으로 지금껏 가슴에 남아 있다. 

 교사나 공무원을 하면 맞을 아버지가 성격에도 어울리지 않는 장사를 시작하셨지만 잔뜩 빚만 지고 손을 털고 말았다. 받을 돈은 받지 못하면서 갚아야 할 돈은 끝내 갚느라 오랫동안 허덕였다. 아버지는 이 장사의 실패를 끝으로 무너지고 말았고 끝내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대신 어머니가 생계를 꾸려나갔지만 어머니 역시 별 뾰족한 수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연탄 배달을 한 적도 있었다. 나도 그 일을 도울 수밖에 없었는데 연탄 검댕을 묻히며 리어카를 끄는 일이 창피해 툴툴거리는 바람에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일쑤였다. 외려 어린 동생이 묵묵히 도왔다. 한번은 연탄을 잔뜩 싣고 언덕길을 내려가다가 뒤에서 잡아 주고 있던 어머니가 힘이 달려 손을 놓치는 바람에 리어카가 길가에 처박힌 적이 있었다. 크게 다친 데도 없었고 다만 연탄이 좀 깨졌을 뿐인데, 이 일로 크게 상심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사라 호 태풍 때에는 지붕이 홀랑 날아가 버리는 일도 있었다. 그때 하필 아버지는 장사를 나가 계셔서 집에는 어린 우리들과 어머니뿐이었다. 거센 바람에 부엌문의 경첩이 빠져 삐걱거렸지만 우리 힘으로는 그 문을 온전히 지켜내기란 역부족이었다. 부엌문이 떨어져버리자 왈칵 밀려든 바람은 온 집을 팽팽하게 부풀리는가 싶더니 급기야는 루핑 지붕을 밀어 올려 홀랑 날려버렸다. 그 지붕은 어디로 날아가 버렸는지 찾을 수도 못했다.

 영도의 신선성당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구호물자를 나눠주었다. 학교를 마치고 양동이를 들고 가 줄서서 기다려 배급받곤 하던 강냉이 가루며 전지분유는 끼니 해결에 도움이 되긴 했지만 나는 그 일이 몹시 싫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야말로 장남의 노릇이라 내가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꼬마라고 수녀님들이 사탕이나 과일을 손에 쥐어 주기도 했는데 어린 눈에는 수녀님들이 천사인 것만 같았다. 이런 고마운 인연으로 어머니가 먼저 가톨릭에 입교를 하셨고 나도 3학년 때 영세를 받았다. 나는 훗날 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어머니는 지금도 그 성당에 다니고 계신다. 

Posted by 배고픈 밥빌런 Posted by 배고픈 밥빌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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