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포스팅 했었던듯 싶은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는다 ㅜㅜ

음력으로 1918년에 작성된 독립선언서다.


익히 알고 있는 1919년 3월 1일의 독립선언 이전에 작성된 것이다.

날짜로는 1919년 2월 1일, 양력(무오년 11월-음력) 발표 되었다고 한다.

전에 포스팅 했을때는 굉장히 고양된 느낌으로 포스팅 했었는데 이번엔 왠지 김이 빠진 느낌이다.

일단 전에 썼던 글이 어느사이엔가 사라져서인듯 싶다.


이 무오독립선언서는 조소앙 선생께서 작성 하셨다고 한다.


대한제국의 폐망에서 대한민국 형성의 중요한 흔적이다.


제국의 봉건사회에서 민중의 주권을 자각하고 실천한 흔적들이 독립선언서들이다.



위키피디아에 보면 무오독립선언서의 의의가 잘 나와있다.

링크


대한민국의 뿌리인 임시정부의 첫 시작이라고 봐야 할 듯하다.

이후 기미독립선언으로 전국적으로 알려졌다고 보는 것이 맞을듯 싶다.

아래는 퍼온글

특히 선언서에는 “대한민주(大韓民主)의 자유를 선포”한다는 표현과 “동권동부(同權同富)”, “등현등수(等賢等壽)”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민주’와 ‘평등’을 선언하는 내용으로, 독립 국가의 지향으로 ‘민주’와 ‘평등’을 강조한 것을 의미한다.

민족 운동가들은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1차 세계 대전 종전 무렵 또 다른 전쟁을 막고자 강대국들 사이에서는 국제연맹을 창설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던 때였다. 미국에서는 민족 자결주의를 표방했고, 1차 세계대전 중 혁명이 일어난 혁명 러시아 정부에서도 약소 민족의 민족 자결을 보장하겠다는 선언이 나온 터였다.

출처-(독립기념관) 링크




국문

우리 대한 동족 남매와 온 세계 우방 동포여!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신성한 평등복리로 우리 자손 여민(黎民: 백성)에 대대로 전하게 하기 위하여, 여기 이민족 전제의 학대와 억압을 해탈하고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우리 대한은 예로부터 우리 대한의 한(韓)이요, 이민족의 한(韓)이 아니라, 반만년사의 내치외교(內治外交)는 한왕한제(韓王韓帝)의 고유 권한이요, 백만방리의 고산(高山) 려수(麗水)는 한남한녀(韓男韓女)의 공유 재산이요, 기골문언(氣骨文言)이 유럽과 아시아에 뛰어난 우리 민족은 능히 자국을 옹호하며 만방을 화합하여 세계에 공진할 천민(天民)이라, 우리 나라의 털끝만한 권한이라도 이민족에게 양보할 의무가 없고, 우리 강토의 촌토라도 이민족이 점유할 권한이 없으며, 우리 나라 한 사람의 한인(韓人)이라도 이민족이 간섭할 조건이 없으니, 우리 한(韓)은 완전한 한인의 한(韓)이라.

슬프도다, 일본의 무력과 재앙이여. 임진 이래로 반도에 쌓아 놓은 악은 만세에 엄폐치 못할지며, 갑오 이후 대륙에서 지은 죄는 만국에 용납지 못할지라. 그들이 전쟁을 즐기는 악습은 자보(自保)니 자위(自衛)니 구실을 만들더니, 마침내 하늘에 반하고 인도에 거스르는 보호 합병을 강제하고, 그들이 맹세를 어기는 패습은 영토니 문호니 기회니 구실을 거짓 삼다가 필경 불의로운 불법의 밀관협약(密款脅約)을 강제로 맺고, 그들의 요망한 정책은 감히 종교와 문화를 말살하였고, 교육을 제한하여 과학의 유통을 막았고, 인권을 박탈하며 경제를 농락하며 군경(軍警)의 무단과 이민이 암계(暗計)로 한족을 멸하고 일인을 증식[滅韓殖日]하려는 간흉을 실행한지라.

적극적, 소극적으로 우리의 한(韓)족을 마멸시킴이 얼마인가.

십년 무력과 재앙의 작란(作亂)이 여기서 극에 이르므로 하늘이 그들의 더러운 덕을 꺼리시어 우리에게 좋은 기회를 주실 새, 우리들은 하늘에 순종하고 인도에 응하여 대한독립을 선포하는 동시에 그들의 합병하던 죄악을 선포하고 징계하니,

1. 일본의 합방 동기는 그들의 소위 범일본주의를 아시아에서 실행함이니, 이는 동아시아의 적이요,

2. 일본의 합방 수단은 사기강박과 불법무도와 무력폭행을 구비하였으니, 이는 국제법규의 악마이며,

3. 일본의 합병 결과는 군경의 야만적 힘과 경제의 압박으로 종족을 마멸하며, 종교를 억압하고 핍박하며, 교육을 제한하여 세계 문화를 저지하고 장애하였으니 이는 인류의 적이라,

그러므로 하늘의 뜻과 사람의 도리[天意人道]와 정의법리(正義法理)에 비추어 만국의 입증으로 합방 무효를 선포하며, 그들의 죄악을 응징하며 우리의 권리를 회복하노라.

슬프도다, 일본의 무력과 재앙이여! 작게 징계하고 크게 타이름이 너희의 복이니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할지어다.

각기 원상(原狀)을 회복함은 아시아의 바램인 동시에 너희도 바램이러니와, 만일 미련하게도 깨닫지 못하면 화근이 모두 너희에게 있으니, 복구자신(復舊自新)의 이익을 반복하여 알아듣게 타이를 것이다.

보라! 인민의 마적이었던 전제와 강권은 잔재가 이미 다하였고, 인류에 부여된 평등과 평화는 명명백백하여, 공의(公義)의 심판과 자유의 보편성은 실로 광겁(曠劫)의 액(厄)을 크게 씻어내고자 하는 천의(天意)의 실현함이요, 약국잔족(弱國殘族)을 구제하는 대지의 복음이라.

장하도다, 시대의 정의여. 이때를 만난 우리는 함께 나아가 무도한 강권속박(强權束縛)을 해탈하고 광명한 평화독립을 회복함은, 하늘의 뜻을 높이 날리며 인심을 순응시키고자 함이며, 지구에 발을 붙인 권리로써 세계를 개조하여 대동건설을 협찬하는 소이로서 우리 여기 2천만 대중의 충성을 대표하여 ,감히 황황일신(皇皇一神)께 분명히 알리고[昭告] 세계 만방에 고하오니, 우리 독립은 하늘과 사람이 모두 향응[天人合應]하는 순수한 동기로 민족자보(民族自保)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함이요, 결코 목전의 이해[眼前利害]에 우연한 충동이 아니며, 은혜와 원한(恩怨)에 관한 감정으로 비문명한 보복수단에 자족한 바가 아니라, 실로 항구일관(恒久一貫)한 국민의 지성이 격발하여 저 이민족으로 하여금 깨닫고 새롭게 함[感悟自新]이며, 우리의 결실은 야비한 정궤(政軌)를 초월하여 진정한 도의를 실현함이라.

아 우리 대중이여, 공의로 독립한 자는 공의로써 진행할지라, 일체의 방편[一切方便]으로 군국전제를 삭제하여 민족 평등을 세계에 널리 베풀[普施]지니 이는 우리 독립의 제일의 뜻[第逸意]이요, 무력 겸병(武力兼倂)을 근절하여 평등한 천하[平均天下]의 공도(公道)로 진행할지니 이는 우리 독립의 본령이요, 밀약사전(密約私戰)을 엄금하고 대동평화를 선전(宣傳)할지니 이는 우리 복국의 사명이요, 동등한 권리와 부[同權同富]를 모든 동포[一切同胞]에게 베풀며 남녀빈부를 고르게 다스리며, 등현등수(等賢等壽)로 지우노유(知愚老幼)에게 균등[均]하게 하여 사해인류(四海人類)를 포용[度]할 것이니 이것이 우리 건국[立國]의 기치(旗幟)요, 나아가 국제불의(國際不義)를 감독하고 우주의 진선미를 체현(體現)할 것이니 이는 우리 대한민족의 시세에 응하고 부활[應時復活]하는 궁극의 의의[究竟義]니라.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同心同德] 2천만 형제자매여! 우리 단군대황조께서 상제(上帝)에 좌우하시어 우리의 기운(機運)을 명하시며, 세계와 시대가 우리의 복리를 돕는다.

정의는 무적의 칼이니 이로써 하늘에 거스르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 손으로 무찌르라. 이로써 5천년 조정의 광휘(光輝)를 현양(顯揚)할 것이며, 이로써 2천만 백성[赤子]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니, 궐기[起]하라 독립군! 제[齊]하라 독립군!

천지로 망(網)한 한번 죽음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인즉, 개·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리오.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와 동체(同體)로 부활할 것이니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며, 집안이 기울어도 나라를 회복되면 3천리 옥토가 자가의 소유이니 일가(一家)를 희생하라!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본령(國民本領)을 자각한 독립임을 기억할 것이며,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시하기 위한 자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며, 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祇奉) 일절(一切) 사망(邪網)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단군기원 4252년 2월 일

김교헌(金敎獻) 김규식(金奎植) 김동삼(金東三) 김약연(金躍淵) 김좌진(金佐鎭) 김학만(金學滿) 여 준(呂 準) 유동열(柳東說) 이 광(李광(李 光) 이대위(李大爲)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이범윤(李範允) 이봉우(李奉雨) 이상룡(李相龍) 이세영(李世永) 이승만(李承晩) 이시영(李始榮) 이종탁(李鍾倬)이종탁(李鍾倬) 이 탁(李 □) 문창범(文昌範) 박성태(朴性泰) 박용만(朴容萬) 박은식(朴殷植) 박찬익(朴贊翼) 손일민(孫一民) 신 정(申정(申 檉) 신채호(申采浩) 안정근(安定根) 안창호(安昌浩) 임 방(任 □) 윤세복(尹世復) 조용은(趙鏞殷) 조 욱(曺욱(曺 煜) 정재관(鄭在寬) 최병학(崔炳學) 한 흥(韓 興) 허 혁(許 爀) 황상규(黃尙奎)



여러 독립선언서 정리 링크

중앙일보 기사 링크

-이하 기사-

대한독립선언서는 지린성 지린시에서 발표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고증이 이뤄지지 않았다. 지린성 허룽시에서 발표됐다는 설도 있다. 기미년(1919년) 3·1 운동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그에 앞서 일본 도쿄에서 있었던 2·8 독립선언도 널리 알려져 있다. 춘원 이광수를 비롯한 일본 거주 유학생들이 발표해 3·1 운동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역사교과서에 수록돼 있기 때문이다.

잊혀진 2·1 독립선언 재조명 목소리

 이와 별도로 해외의 독립운동가 39명이 중국 만주에서 발표한 독립선언문이 있다. 일명 ‘무오독립선언’이라고도 불리는 대한독립선언서다. 시기적으론 3·1과 2·8에 앞선다. 1919년 2월 1일 발표된 이 독립선언문은 당시 해외 독립운동의 거점이던 만주와 연해주, 국내와 일본은 물론 멀리 미국에까지 배포됐다. 독립기념관엔 당시 배포된 선언문 원본이 소장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을 아는 일반인은 극히 드물다. 교과서는커녕 학계에서도 본격적으로 연구한 결과물을 찾기 어렵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대부분의 일반인은 “처음 듣는다”는 반응을 보였고, 국회도서관이나 각종 학술자료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도 관련 논문이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다. 그러니 ‘잊혀진 독립선언’이나 마찬가지다.


96년 전 중국 만주에서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서. [사진 독립기념관]






















중국 교민들 96년 만에 모여 만세삼창
이런 상황을 안타까이 여긴 옛 만주지역인 중국 동북 3성의 교민들이 31일 선양(瀋陽)에서 기념행사를 열었다. 당시의 독립선언 현장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교민 300여 명이 다시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하며 선열들의 뜻을 기린 것이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은 지 70년, 선언서가 발표된 지 96년 만의 일이었다.

 국한문 혼용체로 35행 1723자로 이뤄진 대한독립선언서는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 높던 조소앙(趙素昻·본명 조용은·1887∼1958) 선생이 작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소앙은 임시정부 창설에 관여한 뒤 외무부장을 지냈으며, 삼균주의를 주창한 독립운동가다. 대종교 2대 교주를 지낸 김교헌이 작성했다는 설도 있지만 학계에선 조소앙 기초설을 정설로 본다. 그가 남긴 자서전과 선언서 배포 책임자였던 정원택이 남긴 기록에 따른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던 1918년, 조소앙은 한국 독립에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판단한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이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의 기운이 무르익는 것을 비롯, 국제 정세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만주로 가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가들을 규합했다. 조소앙은 1917년에도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을 호소하는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의 노력이 맺은 결실이 1919년 1월에 창설된 무장투쟁단체인 대한독립의군부였다. 몽양 여운형의 숙부인 여준(呂準)이 주석을 맡고 자신은 부주석을 맡았다. 그 뒤 의군부 간부들이 역할을 분담해 만들고 배포한 문서가 바로 대한독립선언서다. 박용만은 이를 영문으로 번역해 하와이에까지 배포했다. 오늘날 영문본이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등에 전해 내려오는 이유다.

서명인 중 친일 시비 논란 한 명도 없어
대한독립선언서는 3·1 독립선언이나 2·8 독립선언과 뚜렷이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3·1 독립선언이 국내에 있던 민족 대표 33명에 의해 이뤄진 것인 데 반해 해외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선언서에 서명한 39명의 면면을 보면 당시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지도자로 이름 높은 명망가들이 모두 망라돼 있다. 김규식·김좌진·박은식·신채호·안창호·이동녕·이승만·이시영 등 쟁쟁한 인사들이 참여했다. 이들 가운데 의군부에 관여하거나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직접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했고 나머지 인사들은 간접적으로 참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소앙 선생의 조카인 조만제 삼균학회장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39명이 모두 한곳에 모이는 건 불가능했다”며 “미주에서 활동하던 안창호·이승만 등 일부 서명자는 사전·사후 연락을 통해 서명에 동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39명 가운데 친일파 시비에 오르내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이다. 2·8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이광수나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최린·최남선 등 일부 인사가 훗날 친일 행적으로 문제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번 교민 기념식의 기획에 참가한 김영식 한중문화교류원장은 “무오독립선언 참가자 일부는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순국했고 나머지 분들 중에서도 단 한 분 변절한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이 특히 가치를 두는 건 선언서의 내용이다. 3·1 독립선언이나 2·8 독립선언에 비해 훨씬 신랄하게 일제의 침략을 비판하고 더 선명하게 독립의지를 표출했으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방안으로 무장투쟁 노선을 명확하게 제시했기 때문이다.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궐기하라 독립군! 한번 죽음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인즉, 개·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리오, 살신성인하면 2000만 동포와 동체로 부활할 것이니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며 집안이 기울어도 나라를 회복하면 삼천리 옥토가 자가의 소유이니 일가를 희생하라.”

 일제 침략 이전의 원상회복을 촉구한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할지어다”란 부분은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과 맥이 닿는다. 선언서의 압권은 맨 마지막 문장이다.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곧이어 창설되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미주의 일부 독립운동가가 외교에 의한 독립과 실력 양성론을 주장한 것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항일 무장독립투쟁의 시발점 평가
서굉일 한신대 명예교수는 “대한독립선언서는 시기가 앞섰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그 참된 가치는 내용에 있다”며 “청산리 전쟁이나 봉오동 전투 등 훗날 동북지역 무장독립투쟁의 빛나는 성과로 이어지는 그 출발점이 바로 이 선언서”라고 평가했다. 그는 수없이 많은 독립운동 관련 문서 중에서 단재 신채호가 쓴 ‘의열단 선언문’과 함께 이 대한독립선언서를 가장 가치 있는 문서로 꼽았다.

 이 같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대한독립선언서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일천한 편이다. 기초적인 사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게 1차적인 원인이다. 조소앙 자전이나 정원택의 일지 등을 제외하면 1차 사료가 거의 없다. 당시 국내외 신문에도 일절 보도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연구자들은 의군부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인쇄해 배포한 것 이외에 별도의 군중 집회를 하거나 만세운동으로는 연결되지 않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의군부가 비밀결사의 성격을 갖고 있기에 공개행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독립선언 장소가 중국 영토이다 보니 한·중 수교전에는 현지조사를 통한 자료 발굴이나 연구가 이뤄지기 어려웠다.

 독립운동사를 보는 관점의 차이를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 서 교수는 “역사교육 현장에서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중시하고 동북에서의 항일투쟁은 소홀히 다뤄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 역사교과서가 항일무장투쟁을 소홀히 취급하게 된 배경에는 김일성 등 북한 정권을 건국한 세력이 무장투쟁을 강조한 데 대한 반작용 성격이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앞으로 학계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는 부분이 적지 않다. 기본적인 사실관계가 아직 명확하지 않거나 학계에서 의견 일치가 이뤄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선언서 작성 혹은 발표 장소에 대한 고증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학계에선 ‘길림성성(吉林省城)’이란 지명이 조소앙 자전에 기술된 것을 근거로 지린성 지린시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지린성 허룽(和龍)현의 대종교 총본사를 발표 장소로 보는 연구자도 있다.

 실제로는 기미년인 1919년에 발표됐지만 그 명칭이 ‘무오독립선언’으로 알려진 데 대해서도 충분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다. 1919년 2월 1일이 음력으로는 1918년 무오년이어서 무오독립선언으로 불려 왔다고 하나 실은 이날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919년 1월 1일이 된다. 이에 대해 조만제 회장은 “무오년인 1918년에 동지 규합 등 준비작업을 거쳐 1919년에 발표된 것으로 보면 무오독립선언으로 불러도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선언서에 기재된 1919년 2월은 음력으로 봐야 하며, 따라서 실제 날짜는 1919년 3월 11일이란 연구논문이 나와 논쟁을 일으킨 적도 있다. 하지만 조소앙이 남긴 글 가운데 “나는 당시 길림에서 김좌진·황상규 등 동지와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등 독립운동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연락원으로 나경석씨가 국내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가지고 와서 국내 정세를 알게 되었다”는 표현에 따라 학계에서는 3·1 운동보다 앞서는 양력 2월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보훈처도 양력 2월 1일을 발표일로 삼고 있다.

 39명 중엔 널리 알려진 명망가들이 대부분이지만 당시의 활동 내용이나 행적에 대한 조사 연구가 미흡한 인사도 있다. 심지어 이름만 남아 있고 얼굴 사진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 김영식 원장은 “기념식 준비 과정에서 보훈처를 비롯, 백방으로 조사를 했지만 아직 열 분의 사진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동북지역 교민들이 본격적인 기념식을 하게 된 배경에는 잊혀져 가는 독립선언을 재조명하고 학계의 관심을 촉구하는 측면도 있다. 김성웅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선양협의회장은 “광복 70년을 맞아 개최한 이번 기념식이 보다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그 의미가 제대로 평가받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앞으로 동북지역에서 무오독립선언 기념식을 정례화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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