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호의 슬기로운 감방생활

※ 정말 감질나게 올라와서 한번에 볼라고 정리합니다. 

출처는 https://brunch.co.kr/@wsh2016v/

현재 2018.04.07 7화 업데이트



1화. 우상호의 슬기로운 감방생활

국내 몇 안되는 '희괴 범죄자가'가 된다.

우상호라는 사람을 알고 계시는지.

워낙 대변인을 많이 해서, 그리고 지난 해 탄핵 정국 때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를 맡았기 때문에

얼굴이나 이름을 아는 분은 적지 않다.


하지만 정작 우상호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며, 왜 정치를 하는 사람인지 아는 분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내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아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해도 많이 샀다. 항상 어느 계파에도 속하지 않고 파벌을 만들지 않으려는 나의 모습이 특정 계파에 ‘적대적’인 것처럼 비춰지기도 했고, 반대로, 정세균 대표 밑에서 대변인을 하면 ‘정세균 계’, 당의장이 정동영일 때 대변인을 하면 ‘정동영 계’로 불리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래서 이제 내 얘기를 들려드리려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왜 정치에 뛰어들었는지, 나와 정치적인 뜻을 함께했던 이들은 누구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내가 특정 계파로 분류되는 활동을 하지 않는지 알려드리고자 한다. 


나의 이야기는 좀 엉뚱하지만 ‘슬기로운 감방생활’로부터 시작된다. 나의 감방생활은, 사실 슬기롭지는 못했다. 담배를 거기서 배웠기 때문이다. 내게 담배를 건네준 이는 ‘조폭 형님’이었다. 


‘조폭 형님’으로부터 담배를 배웠다고는

하지만 나는 폭력범으로 수감된 사람이 아니었다.

대학생이 폭력범으로 수감될 리가 있겠냐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학생운동을 하던 이들 중에는 시위 집회를 벌이며 ‘폭력을 휘둘렀다’는 죄목으로 수감된 사람이 적지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주 ‘보기 드문 죄목’의

범죄자였다. 바로 ‘국가모독죄’였다.

그런 죄목을 갖게 된 경위도 미묘했다.

나는 87년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을 맡으며

6월 항쟁 기간을 전후해 학내외 갖은 시위와 집회를 지휘했다.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것도

내가 주도한 집회에서였다. 나는 한열에게 최루탄을 겨눈 이들을 처벌해 달라고 검찰에 고소했다.

그러나 검찰은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검찰은 이를 기각했다. 





‘한열이는 죽었는데, 누군가 최루탄을 쏘라 명령했고, 누군가 최루탄을 쏘았는데,

아무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니!’ 나는 분노했다.


검찰에 항의하기 위해 당시 덕수궁 옆에 있었던 서울지검으로 향했다. 

그런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예비검속에 걸렸다.

남대문 소속 경찰들이 내 가슴에 달린 검은 근조 리본을 보고 운동권 학생이구나, 짐작하고 연행한 것이다.  


“야 임마, 꿇어!” 


이른바 ‘닭장차’ 안에서부터 구타가 시작되었다. 남대문 서에 도착해서도 신나게 얻어맞았다.

내 옆에는 당시 총학생회 사회부장이었던 우현도 나란히 무릎을 꿇고 얻어맞고 있었다.

그런데...신원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해프닝이 일어났다.  


#우상호 #집회 #시위

1화 끝



2화. 얼떨결에 검거된 후 얻은 2관왕

우상호, 역사상 '마지막 국가모독죄인'이 되다

형사의 취조가 시작되었다. 


“너 이름이 뭐야?”

“우상혼데요.”

“뭐 우상호? 어디서 많이 들은 이름인데.....연세대 학생회장 우상호?”“예.”


나를 취조 하던 형사가 깜짝 놀랐다.

“뭐? 니가 진짜 우상호야? 

너...무릎 그만 꿇고 일어나서

저~기 의자에 편히 앉아. 응?”


소가 뒷걸음질을 치다 쥐를 잡았다고, 그냥 거리 시위하러 나온 ‘운동권 학생’인 줄 알고 잡아온 놈이 ‘거물급’인 연세대 총학생회장이라는 거다!

뜻밖의 수확에 포상을 받을 기대에 찬 형사가 갑자기 나를 곱게 대우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하튼 나는 ‘정체’가 밝혀지자 곧장 장안동에 위치한 대공분실로 이송되어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죄명’이었다. 

6.29 선언으로 인해 나에게 떨어졌던 집시법(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관련 수배가 해제되었기에, 

나를 잡아 가둘 마땅한 죄목이 없었다. 경찰과 검찰에서는 골머리를 썩일 수밖에. 대통령 선거 전까지

가둬 두고는 싶은데 무슨 죄목으로 가두어야 할까.


그러다 그들이 찾아낸 게 바로 ‘국가모독죄’라는 죄목이었다. 

내가 언제 어떻게 ‘국가를 모독했는지’, 그들의 해석에 따르면 이랬다. 



나는 6월 항쟁을 이끈 학생운동권 중에서도

언론의 주목을 특히 많이 받았다.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부의장이라는 

직책도 있었지만, 한열이가 쓰러진 이후 학생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연세대학교에

늘 많은 내외신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 중 <뉴욕타임스> 니콜라스 크리스토퍼 기자와의 인터뷰 내용이 빌미가 되었다.


다음은 크리스토퍼 기자와의 일문 일답 중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기자: 학생으로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옳은가?

나: 폭력은 상황에 따라 정당화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나치에 대한 폭력은 정당한 것이었다.

기자: 현 정부가 진정으로 나치와 같은가?

나: (중략) 우리는 군사 파시즘에 대항해 싸우고 있다. 한국의 파시즘은 히틀러의 나치즘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

    

옳다구나, 이놈이 감히 우리 정부를 나치에 비교했겠다! 이건 국가모독죄다!!

이들은 이렇게 해서 나를 국가모독죄로 서대문 서에 수감 시켰다.

이 죄목으로 검거된 사람은 나 이전에도 서너 명 밖에 안되고, 

내가 수감 되어 있던 중 형법에서 삭제되었으니

나는 우리 역사상 ‘마지막 국가모독죄인’이 되는 기록을 남겼다.     


그렇게 해서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된 나는 수감생활 중 또 다른 기록을 남기게 되었는데, '

바로 한꺼번에 ‘최초’와 ‘최후’ 타이틀을 거머쥔 옥중 2관왕이 된 것이다


#우상호 #연세대 #마지막

2화 끝




3화. 두 개 감옥을 거쳐 역임한 '옥중 투쟁위원장'

서대문구치소의 마지막, 그리고 의왕시 서울구치소의 제1대 옥중투쟁위원장

내가 거머쥔 타이틀은 바로 서대문구치소의 ‘마지막 옥중투쟁위원장’과 의왕시 서울구치소의 ‘제1대 옥중투쟁위원장’이었다. 내가 수감 되었던 1987년 11월, 서대문구치소는 문을 닫고 수감자들은 새로 생긴 의왕시의 서울구치소로 이감되었다. 


옥중투쟁위원장은 구치소에서 사회적 이슈를 ‘샤우팅’하거나 감방 내 처우개 선 등을 요구하는 투쟁에 앞장서는 역할로, 보통 수감자들의 호선으로 학생운동 출신이 위원장에 선출된다. 내 경우 서대문에서 옥중투쟁위원장을 맡고있던 중에 구치소가 이사를 하게 되었고, 그로인해 두 군데 구치소에서 본의 아니게 ‘최후’와 ‘최초’란 타이틀을 모두 갖게 된 것이다.




하루는 온몸에 문신을 한 사람이 우리 방 앞에 다가와 나에게 물었다.

“그랑께 이번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겄소?”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저는 김대중 후보를 지지합니다.”

“그라제!”


다음날부터 담배 두 가치가 매일 공급되었다. 한 가치당 5000원에 밀매되던 담배가 들어오니, 같은 방 죄수들은 좋아서 난리가 났다. 그러나 군대에서도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는 내 말에 “네가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담배가 끊길텐데, 돈 있어도 못 구하는 건데 그냥 한 모금해!”  결국 나는 슬기로운 감방생활을 하기는 커녕 수감 전까지는 입에도 대지 않던 담배를 감방에서 배우고 말았다. 


하지만 세상 도처에는 늘 뭔가 보고 배울 스승이 있는 법이다.      


나는 감옥에서 잡범들에게 지루박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고, 소매치기 기술도 배웠다. 지금 그 기술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을 수 있는지 예방법을 가르쳐줄 수는 있으니, 그 또한 훌륭한 배움이었다. 

#옥중투쟁위원장 #투쟁 #뉴스

3화 끝




4화. "노무현 좀 콱 찍어주십쇼!"

내가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했던 이유는...

2002년 봄, 다급한 전화 한 통에

나는 제대로 짐 쌀 틈 없이 

강원도로 향하는 차편에 몸을 실었다. 

바로 노무현 후보의 선거 캠프에서 일하던 

후배로부터 선거를 도와 달라는 SOS를 받고 

긴 고민 없이 발길을 강원도로 돌렸던것이다.  

또한 강원도는 내 고향 철원이 있는 곳. 

바로 그곳에 노무현 후보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새천년민주당의 국민참여경선은 

그야말로 전국을 달구고 흥행을 하고 있었다. 

흥행의 핵은 노무현 후보. 지지율 2%에서 시작한

그는 광주 경선에서 승리하며 예기치 못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다가올 강원도 경선이 고비였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이인제 후보가 연고지인 충청도에서 승리를 거두었던지라 

강원도에서 노무현 후보가 연달아 패배한다면 그나마 일던 돌풍이 사그라들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 반드시 이겨야 승기를 잡을 텐데.....’


 나는 수첩을 뒤지며 연고가 닿을 만한 고향 철원의 대의원을 모두 메모했다. 

형 친구, 초등학교 동창, 농민회 회원 등.....

그리고 그로부터 2박3일 동안 철원 바닥을 헤매며 

목이 쉬고 발바닥이 닳도록 전화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 설득했다. 


 “저를 봐서 이번에 노무현 후보 좀 콱 찍어주십쇼!” 


 녹녹지 않았다. 강원도는 전통적으로 보수성이 강한 지역. 

게다가 당시 철원의  현역국회의원은 이인제 후보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고 이용삼의원이었다. 

최선을 다했으나 내가 확보할 수 있었던 대의원수는 겨우 14표였다.


나 스스로 더 많은 대의원을 확보하지 못한 게 안타까웠다. 

왜 그랬을까. 요즘 세간에 ‘친노’로 알려져 있지 않은 내가 

왜 16년 전, 그렇게 열심히 노무현을 도운 것일까.  


그것은 누구의 부탁 때문도 아닌 바로 노무현, 그 때문이었다.      


내가 노무현을 처음 만난 게 언제였던가. 

사실 노무현에 대한 인상이 좋기만 했던 건 아니다. 그는 ‘삐딱했다’.

학생운동을 했던 동료들과 함께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몸을 의자 위에 삐뚜름하니 기대고, 

다소 퉁명스러운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그런 겉모습이나 말투와는 별개로 그가 하는 이야기 속에는 기백이 보였다. 

무엇보다, 생각이 같았다. 


나를 비롯한 많은 386들은 6월 항쟁 때 서울을 중심으로 싸웠지만, 

노무현은 부산에서 앞장 서 싸웠다. 

그러니 우리는 ‘동지’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87년 6월 항쟁 동지들입니다. 

그러니 386들이, 나와 힘을 합해서 우리 정치를 한번 뒤집어 엎어봐야 하는 거 아뇨?”



나는 노무현의 정치적 비전을 보고 그를 지지하기로 했다. 

그래서 2001년 여름에 그를 내 지역구인 서대문구에 초청해 강연회를 열었다. 

그를 새천년민주당 지역구에서 초청해 강연회를 연 것은 우리 지구당이 처음이었다. 

그가 대통령 후보로 나온다는 사실이 알려진 직후였다.


#노무현 #선거 #강원도

4화 끝



5화.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들은 감사 인사

7표차 강원도 경선 승리

나는 노무현의 정치적 비전을 보고 그를 지지하기로 했다. 그래서 2001년 여름에 그를 내 지역구인 서대문구에 초청해 강연회를 열었다. 그를 새천년민주당 지역구에서 초청해 강연회를 연 것은 우리 지구당이 처음이었다. 그가 대통령 후보로 나온다는 사실이 알려진 직후였다. 


400명을 수용하는 구민회관을 강연장으로 잡았다. 주변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노무현인가요? 대세는 이인제인데. 줄을 잘못 서는 거 아닌가요?”

나는 슬쩍 변명했다. 

“다음 번에 이인제 후보도 부를 겁니다.”


물론 내가 나중에 이인제 후보를 

서대문구로 초청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구민회관 강당은 거의 빈 자리 없이 가득 찼다. 400여명의 객석을 본 노무현 후보는 감격한 모습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100명이나 올까 했는데...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나로서는 내가 지지하고자 하는 대통령 후보를 초청하면서 빈자리가 보이도록 할 수 없었다. 열심히 홍보하고 당원들의 참석을 독려했다. 왜 노무현이어야 하는지 설득했다. 

그렇게 나는 ‘노무현 지지’로 커밍아웃 했다.      

얼마 후 강원도를 뛰어다니며 들인 노력에도 14표 밖에 얻지 못한 아쉬움은 

얼마 후 승리의 소식으로 보상받았다. 



박빙이었다. 표차가 7표라니. 

내가 모은 14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확보한 14명은 애초 노무현을 찍을 생각이 거의 없는 분들이었다. 

대낮부터 술잔을 기울이며 간곡히 설득을 한 끝에 마음을 돌려세운 분들이었다. 


“이게 뭐라고 서울에서부터 일부러 달려와 표를 부탁하고....

내가 당신 봐서 이번에 한번 노무현을 찍어보겠소.”



이렇게 말한 분들이 대다수였다. 

나는 이들이 나중에 마음을 바꿀까봐 재차 전화로 약속을 확인했고, 

그래서 ‘이들은 절대 이탈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만일 그 14표가 없었다면 노무현은 ‘7표로 승리’가 아니라 ‘7표로 패배’할 뻔했던 것이다.      


노무현은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신승을 강원도에서 거둠으로써 완전히 ‘대세’로 자리 잡았다. 

이인제 후보 측에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설마 강원도에서 지겠나’라며 승리를 자신했던 것이다. 

이렇게 노 후보는 강원도 승리를 통해 광주에서 불어온 바람을 되살려 

이인제 대세론을 꺾고 결국 수도권에서도 승리해 대선후보로 확정되었다.


이렇게 승기를 잡고 대선후보로 확정된 노무현이었지만, 

그 뒤로도 험난한 길이 이어졌다. 

특히 당내에서 심한 역풍이 불었다. 

#노무현 #강원도 #경선

5화 끝




6화. 하느님, 노무현을 도와주세요

노무현 후보는 알아주었다. 국민들이 기울였던 노력과 진심을

대선이 진행되는 동안 ‘후단협’을 중심으로 민주당 내에서 노무현을 흔드는 이들이 많아졌다. 

노무현은 그런 그들에게 몹시 서운해했다. 


당이 노 후보의 선거운동에 주춤거리자 만들어진 게 국민참여운동본부였다. 

정동영, 추미애, 임종석 의원 등과 배우 문성근이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적극 나섰다. 

나는 상임 부본부장을 맡았다.      


우리는 발로 뛰었다. 노무현 후원금을 모으기 위해 돼지 저금통을 팔러 다녔다. 

밑으로부터 팬덤이 형성되었다. 정치권보다 국민이 더 적극적으로 노무현을 지지했다. 

하지만 선거 당일까지도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 치열한 박빙이 이어졌다.



개표 초기에 엎치락 뒤치락하는 스코어를 보며 나는 초조한 마음에 기도를 시작했다. 


“하느님, 제발 노후보가 당선되게 해주세요. 

이번에 노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정말 열심히 교회에 나가겠습니다.”


내 인생을 통틀어 두 번, 정말 진심을 다해 기도를 했다.

그 하나가 87년 여름 이한열의 소생을 기원하며 올린 기도였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 

하느님은 얼치기 신자의 첫 번째 기도는 들어주지 않으셨지만 

두 번째 기도는 들어주셨다.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겨우 2.3% 포인트 차이로 젖히고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 후 기도 말씀을 지키기 위해 2개월 정도 열심히 교회를 나갔지만, 

그 이후 한 달에 두 번 정도로 소홀해졌다. 하느님 정말 죄송합니다. 



노무현 후보는 알아주었다. 국민참여운동본부가,

그리고 노사모를 비롯한 그를 지지한 국민들이 기울였던 노력과 진심을. 

그래서 대통령에 당선된 바로 그날 밤, 

그는 당선 소식을 듣자마자 당 사무실이 아닌 국민참여운동본부에 먼저 들러 당선의 기쁨을 나누었다. 


당선이 확정되자 그동안 노 후보의 선거운동에 기여하기는커녕 

국민참여운동본부의 위치도 모르던 국회의원들이 눈도장을 찍으려고 본부로 달려왔다. 

이렇게 달려온 이들은 언론의 카메라 앞에서 열심히 당선자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러는 동안 정작 나는 밀려든 사람들 때문에 사무실로는 들어가지도 못한 채 복도에 서 있어야 했다. 


‘국회의원들이란 이런 사람들이구나.’     

원외 위원장이었던 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살갑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이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 그리고 대선 과정에서 

아무리 다른 사람이 대세로 떠올라도 그를 지지하며 선거운동을 뛰었지만, 

지구당 중 처음으로 그를 초청해 강연회를 열어주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그로부터 고맙다는 말 한번 들은 적 없다. 


그러나 나는 나와 가치관과 정치적 전망을 같이하는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보상을 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09년 5월, 나는 그 때문에 눈물을 펑펑 쏟아야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세 달 뒤 또 한번 통곡을 하게 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때문이었다. 


내가 사랑하고 존경했던 두 대통령을 연달아 보내며, 

나는 그해 심신이 모두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내렸다. 

내 평생 그렇게 울어볼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나를 울린 이유는 노무현 대통령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내가 김 대통령을 처음 뵌 것은 1987년 뜨겁던 그 여름이었다.


#노무현 #김대중 #민주당

6화 끝




7화. 상주로써 87년 처음 만난  DJ

 “학생들이 나를 풀려나게 해주었소.”

87년 6월 9일 이한열이 연세대 교정에서 쓰러린 후 수많은 사람이 그의 소생을 기원하며, 

혹은 그를 경찰의 침탈로부터 지키기 위해 세브란스 병원이나 연세대학교를 찾았다. 

학생, 성직자, 재야인사, 정치인....


하지만 김대중 당시 통일민주당 고문은 올 수 없었다. 

가택연금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으로 한열을 만나러 온 것은 7월8일. 

한열이 한 달 가까이 중환자실에 누워있다 결국 절명한 뒤였다.

6.29 선언으로 비로소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김대중 고문이 빈소를 찾아왔다. 

김 고문은 당시 한열의 상주를 맡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학생들이 나를 풀려나게 해주었소.”



김 고문은 울먹이고 있었다. 

그로서는 죽은 한열이 그의 정치적 고향이자 

80년 군부독재의 민간학살의 현장인 광주 출신이라 더욱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그는 다음날 한열의 장례식에도 참여해 지팡이를 짚고 걸어야 하는 불편한 몸으로 

영결식이 열린 연세대학교부터 노제가 열리는 시청까지 시민들과 함께 행진했다.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난 것은 1년이 지난 88년의 일이었다. 




뜻밖의 제안이 왔다. 


“정치 하지 않겠소?”


87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평화민주당과 통일민주당으로 갈라졌다. 

나에게 정치 입문을 제안한 것은 평화민주당 측이었다.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김대중 평민당 총재 측근 인사였다. 


사실 이한열의 장례 이후 김 대통령을 만난 것은 단 한 번이었다. 

두 번째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감했을 때 학생운동을 했던 동료들과 

함께 동교동으로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였다. 


한 시간 정도의 만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별다른 기색이 없었는데, 후에 측근을 통해 출마를 권유하신 것이었다. 

당시 평민당은 진보적 재야인사와 젊은 학생운동권 출신 등을 대거 영입하던 때였다. 

만일 그때 그분의 제안을 받아들여 정계에 입문하고, 바로 국회의원에 출마해서 당선되었다면? 

그때가 내 나이 만 25살이었으니, 아마 최연소 국회의원 기록을 세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정계 입문 제안을 고사했다. 

그것은 나의 소신 때문이었다. 

국민의 힘으로 애써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야권의 분열 때문에 정권교체에 실패한 87년 대선 이후, 


나는 다짐했다. 


#김대중 #민주당 #정치


7화 끝

 


Posted by 배고픈 밥을적게먹어 Posted by 배고픈 밥을적게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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